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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1회]동상_달콤한 꿈

  • -김소연2014-07-15
  • 달콤한 꿈
내일이면 파묵칼레에 들어온 지 한 달이다. 오늘 따라 일찍 호텔로 돌아온 카짐은 내 손을 잡고 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들뜬 어린아이처럼 뛰어서 단숨에 산에 올랐다. 그는 석양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며 안내했다. 이미 소문난 명당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떨어지려는 태양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우리도 빈 자리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헐떡거리는 그와 나의 숨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는 해처럼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 손을 꼭 잡았다. 혈관이 터져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내일부턴 숙박비 지불하지 말고 있어. 넌 내 가족이나 다름 없으니까. 원한다면 방도 더 좋은 데로 옮겨줄게. 아마도 내가 떠날까봐 선수를 치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울었다. 창자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내가 누렸던 행복을 생각하면서 참았다. 그리고 나는 잠잠한 호수가 되어 영원히 내 마음을 그 곳에 묻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순간 명치끝이 아려왔던 건, 왠지 눈물이 났던 건, 그가, 바로 내가 잃어버린 과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그 과거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맞잡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카짐은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기에 남아있어. 나와 함께. … 사랑해. … 처음엔 잘 몰랐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 널 보낼 수 없어. … 사랑한단 말이야. 사랑한다구. … (가슴에 손을 대며) 여기가 너무 아파. 제발 가지마. … 너도 날 사랑한 거 아니었어? 어떤 말을 해도 내가 계속 침묵 속에 잠겨있자, 카짐의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랑’이란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을까. 글로든 말로든 수 십번 아니 수 백번 그 말을 읊조렸을 것이고, 또 그 만큼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바람이 훅 불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사막 위에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처럼, 지구라도 뒤흔들 수 있을 것 같던 사랑은 어느새 내 인생에서 서서히 뒷걸음질쳐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나는 또다시 이 사랑이란 말을 들으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니…. 구름 사이로 태양이 수 갈래의 가지를 뻗으며 천천히 가라앉았고, 태양을 등지고있던 나무들은 검은 실루엣을 만들며 어둠 속에 흡수되어갔다. 이내 사방엔 밤이 내려앉았고, 아름답던 하얀 산들은 빛을 잃자 회색의 단단한 시멘트처럼 우리를 무섭게 둘러쌌다. 나와 카짐은 물에 발을 담근 채 한참을 침묵 속에서 앉아있었다. 관광객들은 하나 둘 떠났고, 이제 우리만 남았다. 나는 그를 쳐다봤다. 그의 입술은 사랑을 잃을까 싶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연약한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랑해. 나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입술을 빠져 나오지는 못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인생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많이. 하지만 인류가 오랜 역사를 거쳐 만들어낸 이 사회의 구조상 사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혼하지 못하면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와 결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외부적 난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과의 자유로운 사랑과-더더군다나 육체적인 사랑과-, 현실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결혼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머리의 기억보다 더 오래간다는 몸의 기억이 평생 나를 괴롭힐 지라도, 이 사랑은, 바로 지금, 내가 끝내야만 했다. 그를 쳐다봤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그의 커다란 눈동자엔 그렁그렁한 물방울이 맺혔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석회산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부드러워서 따뜻해서 좋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망치에 맞은 얼음처럼 산산이 부서져버렸을 것이다. 이제 내 마음은 파묵칼레의 따뜻한 물웅덩이속으로 녹아내려 이대로 영원히 이 곳에 고여있겠지. 나는 방황하는 별빛 사이에서 한참을 떠돌다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일찍 이스탄불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이 곳에 들어왔던 그대로 트렁크 하나와 작은 손가방 하나만을 지니고 떠나면 된다. 침대에 누웠다. 잠시 그와 결혼하는 상상을 했다. 하얀 석회산을 마주하고 날리는 살구나무 꽃의 감미로운 향기 아래서 얼마간은 꿈결처럼 행복하겠지. 맑은 잿빛이 감도는 그의 눈동자와 그의 순결한 체취와 나를 미치도록 즐겁게 하는 그의 신음소리 속에서 어쩌면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한 겹 두 겹 꽃잎처럼 쌓이고, 낯선 땅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다름에 어리둥절하다가 미워하다가 결국은 치를 떨며 등지게 될 것이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섞이기 힘든 데, 하물며 몸을 섞는 거 외엔 아무것도 공유한 것 없는, 열 살이나 어린 이슬람 국가의 남자와 생각과 삶을 함께 한다는 건 소설 속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니 그러기엔 현재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쾅. 쾅. 쾅. 심장을 두드리듯 천둥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카짐이었다. 부어있는 눈꺼풀 아래에선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물 셋이란 나이엔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카짐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카짐은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처럼 그를 따스하게 품었다. 아주 천천히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그리고 그의 귓가에 부드러운 자장가 한 가락을 불어넣었다. 그는 한참을 흐느꼈지만 울음은 점점 잦아졌고 결국은 작은 숨소리만을 내쉬며 편안한 어린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밤새 우리는 그렇게 달콤한 꿈을 함께 꾸었다. 평생 한 번 꿀까말까 한 달콤한 꿈을….